내고향 영동 공암마을은 요즘은 보기드문 沃泉全氏만 살고있는 집성촌이다.
6월달인가? 고향을 지키고 있는 동갑내기 우진이 아저씨로 부터 마을 유래비를 계획한다는 연락을 받고
약간의 찬조를 하였는데 이번에 벌초를 위해 방문해 보니 그사이 2달여 만에 준비를 마치고 준공을 했나보다.
고향을 떠나온지 30년이 넘었는데....
나야 부모님 산소가 있어 한번씩 들른다지만
우리 아들 녀석은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돌봐드리기나 할런지....
언젠가 들러서 유래비에 새겨진 아빠 이름을 보고는 새삼 아빠의 고향이라는걸 느끼겠지...
그러고 보니 찬조를 할때 병현이 이름으로 할걸 그랬나 보다.
찬조금을 낸 명단은 그냥 유래비 뒤에 조그마하게 새겨 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감사의 표시를 했다지만 많은돈을 들여 따로 만들었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
다른 마을에서 우래비를 계획하고 계신다면 참조하시길....
전설 및 설화- 공암 박쥐골
영동에서 서쪽으로 15.2Km 떨어진 학산면 아암리 공암 부락을 박쥐골이라 불러 오기도하고 곰바우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부터 약 400여년전 옥천 전씨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살 때 일이었다. 전씨들은 땅을 일구어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 김을 매고 가을에 풍성한 곡식을 걷어들일 꿈에 부풀어 있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연일 계속 되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한 시각도 쉴틈이 없이 들일을 서둘러 하였다. 젖먹이 어린 아기를 밭 둑에 눕혀두고 아낙들은 밭을 매었다.
해가 질 무렵 아낙은 호미를 집어 던지고 이번에는 쇠풀을 베었다.
아낙들은 쇠풀과 연장 따위를 먼저 집에다 가져다 두고 나서 밭 뚝에 눕혀둔 아기를 데려갈 생각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농촌 살림에서 소는 한 사람의 식구 보다도 어느 때는 더 소중하였고 소를 먹이는 일은 아기를 키우는 일만치
정성이 필요한 것이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아낙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이번에는 아기를 업으로 들로 갔다. 밭둑에 눕혀둔 아기가
본래 순동이어서 그저 어미 젖만 모자라지 않으면 하루 종일 잠만 잤다.
아낙은 밭 둑으로 가서 아기 이름을 부르면서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팍 팍 팍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새떼가 아기 몸에서 날아갔다.
아낙은 질겁을 하고 놀라 아시 몸을 쓸어 안았다. 허공으로 날아간 세때는 새가 아니라 박쥐 떼였다.
아낙은 아기를 풍에 안고 들여다 보았으나 아기는 울지도 않았고 어미를 반기지도 않았다.
아낙은 아기 얼굴에 제 얼굴을 부비면서 울부짖었다. 아기 얼굴에서 얼룩진 피가 어미의 얼굴로 젖어 들었다.
얼굴만이 아니라 아기의 몸은 온통 피 투성 이였다. 그 사이 박쥐떼가 잠이 든 아기를 파먹은 것이었다.
아낙은 죽은 아기를 품에 안고 마을로 돌아왔다. 아낙의 통곡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달려 나왔다.
아기의 죽음이 박쥐 때문이라는 것을 안 마을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있는 동굴로 달려 갔다.
동굴 속에는 박쥐가 살고 있었다. 마을에 동굴이 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은 굼바우라 불러오고
그들은 굼바우 속에서 살고 있는 박쥐가 원수 같았다.
젊은 이들은 그 굼방우 속에다 불을 놓았다. 연기가 굴 안으로 들어가자 굴안에 있던 박쥐들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굴 입구에서 지키고 서 있던 젊은이들은 밖으로 날아 오르는 박쥐를 몽둥이로 때려 잡았다.
박쥐와 마을 사람들 사이에 한차례 실랑이를 벌인 뒤부터 그러한 불상사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나
마을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공암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도 또 박쥐골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다.
아암리에 속해 있는 공암은 박쥐와 인연이 깊은 이름이라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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